포항 ─ 뜻 밖의 여정

개발부서의 여과집진기 교육

포항: 뜻 밖의 여정


13일 아침 8시 12분 알 수 없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어젯밤의 짐 정리로, 내 새 보금자리는 아직 정돈되지 않았다. 어질러져 있는 책상이 울리고 있었다. ‘누구일까?’ 이제 막 출근하려던 나는 의구심에 전화를 받았다. “어… 누…” / “손민철 대리입니다! 언제 오시나요?” / “아 곧 갑니다!”. 외투를 입으면서 생각했다. ‘근데 아직 출근 시간이 아닌데… 뭘까?’. 싸늘했다. 처음 출근한 지 2주도 안 된 새집에서의 첫 출근길. 아직 익숙하지 않은 골목 사이로 복잡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뭐지? 대체 뭐지? 내가 뭘 놓쳤나?’. 결국 아무런 해답 없이 출근 도장을 찍었다. 참을 수 없는 의구심에 바로 손 대리님을 찾아갔다. 말 한마디 꺼내기 전에 이미 불안함이 엄습했다. 상자와 헬멧, 그리고 등에 매여져 있는 가방. 무엇보다 이상하리만큼 부재한 개발부서의 키보드 소리. 그렇다, 개발부서에는 오직 나와 대리님 그리고 부장님만 있었을 뿐이다.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손 대리님…” 그 순간 부장님이 무심하듯 일어났다. 반듯한 가방을 멘 채로 말이다. 이미 모든 것이 확실했지만, 나는 아니길 바라며 마저 물어봤다 “혹시 오늘이 포항 출장입니까?”. 사실 손 대리님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중요치 않았다. 이미 손 대리님의 고개는 끄덕이고 있었고, 나는 오직 한가지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망했다’

밀려오는 당혹감, 그리고 배반감이 몰려왔다. 분명 출근 첫 주에 구글 캘린더에 적어둔 일정이다. 유일한 차이점은 월요일이 아닌 화요일이라는 것뿐. 하지만 그런 건 중요치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틀렸다는 것이고,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뿐이다. 반평생 같았던 2초가 지나고, 부장님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오늘 출장인 걸 몰랐어요?”

다행히 손 대리님과 부장님의 배려로 별일 없었다. 손 대리님은 자신도 저번 주 목요일까지만 해도 몰랐다면서, 나를 위로했다. 법인 차로 내 집 앞까지 데려가면서, 내가 집에서 짐을 쌓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다. 감사했다. 20분 남짓 만에 집에 돌아와, 대충 빈 가방에 주변 옷가지를 쑤셔 넣었다. 그렇게 포항으로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이번 출장이 대단히 소중한 기회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에어릭스에 몇 년 있었던 대리님들조차 처음 받아본 교육이며, 무엇보다 내가 맡은 업무에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업무는 데이터 분석이다. 물론 데이터만 있다면, 결괏값을 도출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데이터를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결국에는 사람이라는 것을 오랫동안 교육받았다. 두 번 다시 있기 힘든 기회이며, 앞으로의 업무 퍼포먼스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지 출근 2주도 안 된 나에게 온 행운일 뿐. 가볍게 왔다고 하여, 가벼이 여길 기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장님의 명강의


교육의_시작

교육 자료를 먼저 받았다. 당연히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지만, 모를수록 최대한 이해하려고 했다. 다행히 첫 페이지의 그림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질문 사항 몇 가지만 머릿속에 둔 채 교육장으로 갔다.

사실 나는 필기구조차 없었다. 워낙 급하게 나온지라, 가장 중요한 몇 가지를 빠뜨렸다. 고맙게도 나의 한 달 선임인 강민구 사원이 나에게 연필을 빌려주었다.

최대한 집중했다. 물론 조금 피곤했다. 옆의 난방기 바람은 나를 노곤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30분 지각하며, 운전조차 하지 않는 내가 피곤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했다. 휴식 시간에 순간 긴장이 풀리며, 알게 모르게 눈을 비비고 있었던 찰나. 부장님이 물었다. “피곤해요?”.

소장님의_열정

나는 최대한 많이 물어봤다. 가지고 있던 의문을 해소할 기회는 사실상 지금 밖에 없다는 듯이 물어봤다. 솔직히 지금 와서 이실직고하자면, 나는 당시 정수화 선생님이 수석 연구소장님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단순히 에어릭스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신 베테랑일 거라는 것만 지레짐작하고, 준비하신 자료를 감사히 보고 있을 따름이었을 뿐이다. 또한 열정 있게 강의해주신 덕분에 맨 뒤에 있던 나에게조차 강의 내용 전달이 매우 잘 되었다. 잘 전달된 강의 때문에 잘 이해할 수 있었고, 잘 이해한 만큼 양질의 질문이 많이 나올 수 있었다.

예리한 질문


강의실의_열정

손민철 대리님, 이상훈 부장님, 이준희 선생님 모두 날카로운 질문들을 해주셨다. 상당히 높은 수준의 질문들 덕분에 강의의 퀄리티가 올라가는 선순환이 이어져 갔다. 모든 질문이 들었을 때마다, 궁금증을 유발할 정도로 질이 높았으며, 소장님 또한 질 높은 답변을 해주셨다.

열정은_현장에서도_느껴졌다.

현장 답사를 하였다. 외부에는 해체한, 혹은 조립 예정인 여과 집진기의 부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구름이 끼고, 겨울의 한기를 머금고 있는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강의의 열정과 분위기는 추위를 느끼지 못할 만큼 뜨거웠다. 방금 ppt에서 본 강의 내용을 바로 실물로 보니, 강의 내용에 대한 이해력이 높아져만 갔다. 답사 중 유일하게 흔들린 것은 그날 처음 써본 나의 에어릭스 안전모뿐이었다.

단두장의_사진으로_느껴지는_소장님의 열정
  • 단 두장의 사진 만으로도 소장님의 열정을 느낄 수 있다.

월요일과 화요일 각각 2시간 반가량 이어지는 교육이었다. 허나, 잘 만든 영화를 보듯이, 지루할 틈이 없는 강의와 실습이었다. 본편과 속편 모두 지루할 틈 없는 명작을 보는 듯하였다.

명품조연


주인공 뒤에는 그만큼 훌륭한 조연이 있기 마련이다. 하나는 최석구대리님의 부상 투혼이 있다. 최 대리님은 정수화 소장님을 훌륭히 보좌하였다. 하지만 내가 인상 깊었던 것은 최 대리님은 행동보다는 눈빛이었다. 거의 모든 질문마다, 해당 질문의 답변을 할 수 있는 듯한 무언의 시그널을 보내셨다. 물론 소장님이 워낙 좋은 답변을 해주셨다. 하지만, 소장님을 그토록 잘 보좌할 수 있는 데에는 그만큼 깊은 이해력이 바탕이 된다는 것을 지레짐작할 수 있었다. 최 대리님이 아프다는 것을 월요일 강의가 끝난 다음에서야 알아차렸을 정도였다.

강민석사원님의_프로페셔널리즘

또 하나는 강민석 사원님이 있었다. 그 모든 강의를 삼각대를 챙기면서까지 열의 있게 촬영에 임하였다. 강민석 사원님 또한 강의에 질문을 던지고 싶었을 거리라 생각이 된다. 허나, 전직 유튜버라는 점과 더불어 자신의 직무를 아무 말 없이 프로페셔널 하게 수행하였다. 강민석 사원님은 현장 실습에 더 빛이 났다. 더 좋은 각도의 영상 촬영을 위해 누구보다 바쁘게 움직였다. 덕분에 여과집진기 교육은 개발부서의 아련한 기억 속의 추억이 아닌, 녹화된 하나의 기록이 되었다.